바람이 분다

통제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분노

트망 2024. 1. 15. 13:08

이 상황을 내가 통제할 수 없음이 ‘화’로 나타난다고 정재승 교수는 말한다. 오호! 무릎을 탁 쳤다. 통제할 수 없다는 느낌은 통제하고 싶다는 욕구 다음일 테니. 내 뜻대로 되지 않으니 기분이 좋을 리 없다. 물론 그것을 어떻게 발산하느냐는 다른 문제다.

 

세상의 많은 다툼은 그것에서 오는 것이 아닐까. 통제할 수 없는 상황에는 사람도 포함될 테니까. 그렇다고 통제하고 싶은 대상에게만 그것을 풀어놓지는 않는다. 통제하고자 하는 그것이 사람이 아닐 때, 혹은 내가 어떤 지랄을 해도 꿈쩍하지 않는 사람일 때 우리는 다른 대상을 찾기도 한다. 그것에 반응하는 사람으로. 가장 좋은 건 가까이 있는 사람이다. 그렇다. 지금 떠오른 그 사람이다.

 

누군가에게 화를 표출한다 한들 그것이 해결되리라는 보장은 없다. 화를 내는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면. 당장은 그렇게 보이지 않을지라도 어쩌면 일을 더 키우는 혹은 일을 더 늘리는 것인지도 모른다. 물론 화를 냄으로써 무언가 해결되는 듯이 느끼는 사람이 있는지도 모른다. 오로지 ‘지금’만 소중하다면, 지금만 넘어가면 아무러해도 괜찮다면 해결되기도 한다. 아무리 말을 해도 움직이지 않는 누군가에게 화를 내며 윽박지를 수 있다. 나의 말을 진지하게 듣지 않는 누군가에게 버럭하며 나의 진정성을 알릴 수도 있다. 그러면 당장은 해결되는 것 같다. 때로는 실제로 그러기도 하고. 하지만 대부분은 쉽게 해결되지 않는다. 많은 문제들은 반복되기 때문이다. 같은 상황이 돌아왔을 때 늘 똑같이 화를 낼 수는 없다. 가능하다 해도 그 효과는 금방 반감된다.

 

그런데 왜 나는 그 많은 것들을 통제하고 싶어 할까. 왜 모든 것이 내 생각대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내 의지나 바람과 다른 방향으로 진행되는 것이 그렇게도 거북한가. 내가 늘 옳다고 생각하는가. 세상에는 내가 아닌 수많은 사람이 있고, 그들은 각자의 의지대로 생각하고 움직인다. 언젠가 유행했던 혈액형 개그처럼 누군가는 방 전체를 휘젓고 다니고 누군가는 방 한 가운데 서 있으며 누군가는 구석을 보고 있는 것이다. 또 누군가는 벽을 뚫기 위해 노력하기도 한다. 이 많은 사람들의 생각, 취향, 의지가 나와 같기를 바라는 건 터무니없는 생각이다. 절대 같을 수 없다.

 

소위 ‘상식’을 담은 책이 있다. 개인적으로 ‘상식’이라는 말을 자제하려 애쓴다. 그 단어가 주는 ‘당연함’을 나는 싫어한다. 그 안에는 누구나 안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누구라도 알아야 한다는 의미가 있다. 반대로 말하면 모르는 건 안 된다는 이야기다. 모르면 이상한 거다.

 

그것이 색안경을 끼게 한다. 나로서는 당연한 그것을 하지 않는 사람은, 당연히 이상하다. 무지하다. 틀렸다. 무가치하다. 행동이 어떻게 나올지는 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