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로 태어났음에
대단히 반사회적인 성향은 아니었음에도 유독 ‘아들’이라는 단어가 싫었다. 왠지 대우받는 기분이랄까. 물론 나를 챙겨주는 것 자체가 싫을 리 없다. 챙겨주지 않을 때 나름의 서러움을 느끼는 것을 보면. 그저 대우의 이유가 ‘아들’ 뿐인 것 같아 부끄럽고 껄끄러웠다. 게다가 그 시절에도 아들 하나쯤은 있는 게 좋은 것 같은 분위기였으니까. 부담스러웠다. 그다지 반항이 심한 편은 아니었는데, 그런 판단이 들면 곧잘 쏘아대곤 했던 기억이 남아있다.
사냥을 하거나 농사를 지을 때는 말 그대로 육체적인 힘이 가장 중요해서 보통은 남자를 우대했을 거라는 말에 동의하는 편이다. 그것이 무엇이든 순위를 정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것이나 사람을 더 높이 평가하게 되니까. 그러니 그럴 수 있다. 그다음은 ‘관성’에 따라 움직인다. 지금껏 해온 대로 계속하는 모양새다. 그렇게 보고 배웠으니까, 그렇게 살아왔으니까. 때로는 그것이 부당하다고 느껴지더라도 몸은 처음과 다른 것에 극도의 어색함을 느껴 오히려 기존의 것을 따르기도 한다. 그래서 여전하다. 남성이 여성보다 우월하다거나, 어느 집이든 아들이 꼭 있어야 한다고 공식적으로 말하는 이는 많이 줄었을지언정, 그 속내는 그렇지 않은 경우가 지금도 많다.
이제는 조금 따져볼 때가 되었다. 사실은 이미 오래 전부터다. 그 이유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도대체 왜 그렇게 아들에 집착하는가. 짐작하건대 다음과 같은 대답이지 않을까.
“대를 이어야 하니까.”
“남자가 집안을 이끌 수 있으니까.”
“그래야 마음이 든든해서.”
‘대를 잇는다’는 건 하나의 믿음이다. 남자를 통해야 집안이 이어지는 것이라는 믿음. 물론 이미 그렇게 만들어진 세상이기에 그것에 따라야만 이룰 수 있는 무언가가 분명히 있다. 하지만 그뿐이다. 누군가의 삶에는 굉장히 중요할 수 있지만, 실상 근본적이거나 무언가 더 큰 의미는 찾을 수 없다. 그럼에도 아들이기에 더 대우 받고 큰소리치는 곳은 여전히 존재한다. 여자만 있는 집안은, 대가 끊긴다.
아들과 딸에서 끝나는 것도 아니다. 우리 사회는 여전히 남성 중심으로 돌아간다. 그것을 모두 실력의 문제라고 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물론 남자인 나로서는 편한 것이 사실이지만, 눈에 띌 때마다 매우 껄끄럽다. 평등을 주장하는 우리가 가장 가까운 곳의 그것을 위해 한 일은 무엇일까.
무언가에 대한 믿음을 무조건 나쁘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 믿음으로 인해 누군가 차별을 받는다면 고민해 보아야 한다. 게다가 이미 수많은 사람들이 성별 차이가 능력의 차이를 만들지 않음을 증명했다. 우리 대부분이 알고 있듯이. 다만 우리 중 누군가는 그것을 쉬이 입밖에 내지 못할 뿐이다. 주도권을 빼앗기기 싫어서, 부끄러워서, 남들과 다른 목소리를 내기가 두려워서. 때론 지금껏 해 온 나의 행동을 정당화시키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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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은 집안의 기둥이니 제일 좋은 것을 가장 먼저 받아야 한다. 아들은 누나가 혹은 여동생이 사용하던 것을 물려받는다. 아들이 무조건 양보해야 한다. 그것은 아들이 더 잘하지만, 그럴 리 없다. 아니, 그러면 안 된다. 너는 딸이 아니니까.
모든 궂은 일은 남자가 해야 한다. 얼굴이 잘생기지 못하거나 키가 크지 않거나 몸무게가 평균을 웃돌거나 몸매가 좋지 않은 남자들은 사람들의 놀림거리가 된다. 그래 가지고 장가나 제대로 가겠냐고 핀잔 듣기 일쑤다. 성형을 하기 위해 병원으로 몰리고 몸매를 만들기 위해 헬스장 혹은 병원으로 몰린다. 그러기 싫지만 가야 한다. 세상과 싸울 생각이 아니라면.
다른 여자 직원들보다 업무능력이 뛰어나지만 진급에서 늘 밀린다. “여자들보다 높은 직급에 있으면 그 많은 여자들이 잘 따르겠냐”는 말 같지도 않은 이유도 들린다. 늘 정장을 입고 머리도 단정히 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뒤에서 키득거리는 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가끔은 앞에서도 그런다. 물론 잘(?) 하고 다녀도 누군가는 입을 놀릴 테고.
언젠가는 지금과 반대의 상황이 올 수도 있다. 작용이 있으면 반작용이 있기 마련이다. 불만, 반대, 자각. 같은 마음이 모이기 시작하면 세상은 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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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하나가 다른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믿을 수 있다. 하지만 다른 것이 ‘덜’ 중요하거나 ‘안’ 중요해서 희생되어도 무방하다는 뜻은 아니다. 하물며 그 대상이 사람이라면 더더욱 안 될 일이다.
나는 여전히, 학생 시절부터 지금까지, 남자로 태어났음에 다행이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