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분다

가식 처세 배려

트망 2024. 1. 21. 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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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안. 네 말을 안 들으려는 게 아니라 네 뒤 티비 광고에 나오는 저 배우를 보니까 지난 번에 어떤 예능에서 그가 먹던 음식이 떠올라 갑자기 먹고 싶어져서 우리 동네에 그걸 파는 곳이 있는가 생각을 하고 있었어. 물론 네가 말하고 있는 그 주제는 꼭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을 정도로 너무나 가벼워 보여서 진지하게 또 길게 들어 주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 것도 사실이야. 그래도 기분이 나빴다면 사과할게. 다시 말해 주겠어? 이번에는 들어 보도록 노력할게. 보장할 수는 없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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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오랜만이다. 옆에 누구? 아~ 반갑습니다. 야 그런데 너 지난 번에 만나던 사람이랑 얼마 전에 헤어졌다고 들었는데 벌써 새로운 사람을 만났구나! 멋지네~. 맞다 그러고 보니 그 친구 내가 어제 길에서 만나서 인사했는데, 뭐 너랑 그렇게 됐다고 대놓고 모른척 하기는 좀 그러니까. 게다가 너랑 나랑은 그리 가까운 사이도 아니니……. 그래 그렇게 마주쳤는데 얼굴이 많이 안 좋더라구. 나한테 너 잘 있느냐고 물어보더라. 나도 잘 모른다고 했는데, 물론 실제로도 잘 모르고, 그런데 오늘 여기서 만나네! 너 예전에 그 친구 만날 때 나한테 전화해서 울며불며 하던 거 기억 나냐? 자주 그런다더니 그 일 때문에 헤어진 거야? 뭐 만나고 헤어지는 거야 늘 있는 일이니까. 아무튼 축하한다. 잘 어울리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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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송합니다. 하지만 이번 일은 제 잘못이라고 할 수만은 없습니다. 납품 일주일쯤 전에 사실은 제가 그 오류를 보았거든요. 그래서 장 과장에게 제가 말을 했습니다. 이러저러하니 수정에 들어가야 하지 않겠느냐고요. 그랬더니 장 과장이 그 작은 걸 누가 알겠냐고, 어차피 큰 지장도 없는 오류라면서 마무리하라고 했습니다. 상사의 지시인지라 그냥 두어야지 했다가 도저히 찜찜함을 떨칠 수 없어 다음 날 다시 얘기를 했습니다. 용기를 내었죠. 물론 호된 꾸지람을 들었습니다. 추가비용과 시간, 그를 위해 더 일해야 하는 다른 직원들의 원망은 누가 들을 것이며, 또 위로부터의 질책은 누가 받느냐고요. 어차피 그거 다 장 과장 자신이 받는다고 니(저 말입니다.)가 책임질 거 아니면 더이상 얘기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하루종일 혼났어요. 아시다시피 장 과장 입이 좀……. 세상에 그런 거친 표현이 있는 줄 처음 알았습니다. 게다가 말로 끝나지도 않았습니다. 그참에 오래 된 쓰레기통을 결국 바꾸게 되었으니 불행 중 다행일지도요. 아무튼 그때 오류를 잡았더라도 기한에 충분히 맞출 수 있었을 겁니다. 제 업무이니만큼 제 잘못이 전혀 없다고 할 수는 없지만 아시다시피 직장인이라는 게 상사의 말을 무시할 수 없는 거잖아요. 아무리 무식하고 뭣도 모르는 상사라 하더라도요. 그러니까 저에게는 이 정도만 하시면 안 될까요? 조금 더 하시면 확 다 뒤집어 버리고 때려칠 것 같아서 그럽니다. 그렇다고 제가 어디 갈 곳이 있는 것도 아니니 불안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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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솔직해지려 노력하지만 어느 정도까지 솔직해져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또 다른 에너지를 쏟아야만 한다. 속을 알아야 서로를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테니 이왕이면 솔직해져야겠는데, 어느 관계든 너무 깊은 곳까지 알게 되면 되려 껄끄러워지기 때문이다. 시스템이 돌아가는데 누군가의 진심 같은 건 전혀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을 테고.

속을 내비치지 않으려 했던 어린 시절을 지나서 이제는 점점 솔직하게 뱉어 내려는 편인데, 가만 보니 어느 만큼 가능할지 모르겠다. 편하게 한쪽으로만 갔으면 좋겠는데 살아가려면 이것도 저것도 필요하겠지. 나와 관계하는 사람들이 나에게 세상 솔직하다면 그를 마주하는 내가 버텨낼 수 있을지도 미지수고. 가식이든 거짓이든 처세든 필요할 때가 있는 것 같다. 속은 쓰리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