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다
난 그다지 ‘남자답지’ 못하다. 살면서 그것을 뽐냈던 날은 열 손가락을 다 채우지도 못할 정도이니. 그중 하루는 신병훈련소에서 넉가래로 눈을 치우던 날이었다. 그곳을 나오던 날 받은 ‘조용하다’ ‘여성스럽다’ ‘남자다워져라’ 등의 말들만 가득한 롤링페이퍼 한 곳에 대충 이렇게 적혀 있었다. ‘눈을 치우던 그날 남자다웠다’고.
사회초년생이었던 어느 날이다. 사무실에 있는 몇 대의 컴퓨터를 연결해야만 했다. 나는 그 작업이 무언지 정확히 알지 못했다(물론 지금도 잘 모른다). 상사의 작업에 보조라도 할 수 있다면 다행이었다. 여성이었던 그분이 한참 구석에서 작업을 하다가 푸념인지 투정인지 한마디 한다. “사무실에 남자가 몇 명인데 이걸 내가 해야 하나….” 덧붙이기를 xx씨는 이것을 못 하느냐고 묻는다. 모르니까 이러고 있는 거지 뭘 묻나 싶었지만 순순히 대답한다. 그랬더니 남자가 이런 것도 모르냐 한다. 자신은 전등도 혼자 교체한다며. 그래서 내가 물었다. “음식 잘하세요?”
이모와 삼촌의 조카 사랑은 차고 넘칠 정도이다. 자기 자식이어도 저 정도까지 하려나 싶을 만큼. 크고 작은 선물을 자주 사 준다(물론 나는 대부분의 삼촌이 아니다). 장난감을 좋아할까, 책을 사 줄까, 이 옷이 잘 어울릴까 하면서. 하지만 고민의 결과는 비슷하다. 여자아이라면 ‘예쁜’ 가방, ‘예쁜’ 인형, ‘예쁜’ 옷, 남자아이라면 ‘멋진’ 가방, ‘멋진’ 장난감, ‘멋진’ 옷. 그걸 굳이 색으로 구분하자면 핑크와 검정 정도가 될 것이다. 가끔씩 제법 괜찮아 보이는 신선한 것을 유심히 살피지만 손에 들게 되는 것은 역시 고만고만하다. 그렇다. 비슷하다. 어제의 선택과. 아마 수많은 삼촌과 이모들의 선택과도. 하지만 고민의 방향을 조금 바꿀 필요가 있다. 아이가 정말 그 색을 좋아할까. 정말 인형을 혹은 로봇을 가지고 싶어 할까. 선물의 목적이 아이의 기쁨이라면 당연히 물어야 하는 질문이다. 어떤 것을 원할까. 그리고 가끔은 이렇게 물어봐야 할지도 모른다. ‘이것은 혹시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닐까?’
사람은 환경을 영향을 받는다. 그럴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내가 알고 있는 아이의 선호는 진짜일까. 어린아이에게 줄 선물만 보고 그 대상이 여자아이인지 남자아이인지 정확히 맞힐 확률이 99% 정도는 되지 않을까? 물론 잘 모르고 행하는 경우도 많다. 조용하다, 멋지다, 씩씩하다, 예쁘다, 얌전하다 등의 칭찬의 말을 나도 모르게 구분하여 사용하는 건 정말 흔한 일이다. 조용한 남자아이는 ‘내성적’이어서, 활발한 여자아이는 ‘왈가닥’이어서 모두의 걱정거리가 되기도 하니까.
물론 외부의 영향을 그저 나쁘게만 볼 일은 아니다. 무엇이든 주변의 영향을 받는 게 당연한 일이다. 나 혼자만 사는 것도 아니니 주변의 반응에 혹은 기대에 신경을 쓸 수밖에 없다. 질서 혹은 심적인 안정을 위해서는 필요한 일이기도 하니까. 하지만 그 결과가 어찌 될지에 대한 고민은 필요하다. 주변에 신경을 쓴다는 것은 그들의 기대에 따를 의향이 있다는 것이니까. 어쩌면 다른 질문이 필요할지도 모르겠다. 내가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 내가 가지고 있는 다양한 구분법들은 정말 나의 의지로 만들어진 것인가.
나의 왜소한 체격을 딱히 못마땅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무언가 동경하는 모습을 그릴 때가 있었다. 키가 조금 컸으면, 어깨가 떡 벌어졌다면, 눈이 부리부리하다면, 강한 인상이었다면. 한마디로 ‘남자다운’ 외모다. 하지만 남자답고 여자다운 게 어디 있을까. 그저 알아듣기 가장 좋은 단어일 뿐이다. 그저 하나의 ‘선호’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래야 하는 게 아니다. 내가(혹은 네가) 그렇다는 거다. 그것의 기원이 무엇이든.
세상 어딘가에는 차마 핫핑크를 집을 수 없어 괴로워하는 남자가 있을지도 모른다. 조용히 십자수를 즐기고 싶지만 애써 외면하며 운동에 몰두하는 ‘척’하는 남자가 어딘가에 존재할지도 모른다. 삼단 로봇 장난감을 가지고 싶지만 친구들이 모두 인형만 가지고 놀아서 혹은 이모나 삼촌이 인형만 사다 주어서 어쩔 수 없이 인형만 가지고 놀아야 하는 여자아이가 있을 수도 있다. 물론 세상에는 늘 다수가 있고 소수가 있다. 그래서 ‘보통’ 혹은 ‘일반적인’ 것이 생기는 것이다. 문제는 그 ‘보통’ ‘일반적인’ ‘평균적인’ 것이 옳다고 믿는 데 있다. 일반에 끼지 못하고 튀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도 그 믿음에서 오는 것은 아닐까. 하루이틀 된 이야기는 아니다. 끝나지도 않을 것 같다. 그저 그 안에서 자기 자신이 될 수 없는 우리 중 누군가가 안쓰러울 뿐이다.
이름에는 계속해서 다양한 의미가 덧붙여진다. 시간이 지날수록, 많은 사람들이 사용할수록 점점 더 함축적 의미를 가진다. 강해서 활발해서 울지 않아서 ‘남자’라고 하는 게 아니다. 세심해서 연약해서 조용해서 ‘여자’라고 하는 게 아닌 것처럼. 그럼에도 그 모든 것들이 그 단어의 정의가 된다. 그리고 우리는 종종 그 단어에 갇힌다. 애초에 정의한 모양과 성질이 아니면 무언가 잘못되었다고 여긴다. 이상한 것이 된다. 무엇을 정의한다는 것은 효율적 측면에서 매우 좋지만 때로는 무언가를 제한하는 작용을 한다. 그래서 ‘남자답지 못하다’거나 ‘어른스럽다’는 표현을 하는 것이다. 여행지에서 사용한 두꺼운 책자를 다른 여행자에게 주었더니 베개로 쓰기 좋다는 후기를 들었다. 그렇다. 베개일 수 있다. 때로는 냄비받침도 될 것이다. 책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을 뿐.
사람을 대할 때, 세상이 지어준 이름에 얽매이지 않기를 바란다. 성별, 나이, 경제상황, 직책은 그저 하나의 지표일 뿐 그 사람이 아니다. 사람은 절대 한 단어로 표현할 수 없는 고유한 것들을 가지고 있다. 우리가 보아야 하고 보려고 노력해야 하는 건 그것이 아닐까. 성별과 나이 혹은 직업만으로 누군가를 온전히 판단할 수는 없다. 그런 과정들은, 어쩔 수 없을지언정 정답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