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과 출력
아주 열과 성을 다하여 공부해 본 적은 별로 없는 것 같다. 간혹 있기는 했으나 기간은 언급하기 부끄러울 정도로 짧다. 어려서는 공부를 해야 하는 이유를 알 수 없었으니까. 납득할 만한 이유가 없으면 잘 따르지 않았으므로 더더욱 ‘열심히’ 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머리는 좋은데 공부를 안 하고 있는 우리 애’는 내가 아니었으니 특별히 억울할 건 없다.
고등학생 시절, 수업시간 내내 필기를 하는 수업이 있었다. 화학이었다. 그림인지 글자인지 알 수 없는 것들이 뒤섞인다. 어디서부터 잘못 된 건지 알 수 없지만, 일단 받아적는다. 녹색 칠판을 두 번 세 번 지워가며 필기를 하시는 선생님. 수업시간에 같은 공간에 있었다는 것 말고는 무엇 하나 공유할 수 없는데도 그 선생님의 얼굴이 어렴풋이나마 기억난다는 게 신기하다. 다른 수업도 별만 다르지 않았다. 솔직히 학교 수업은 죄다 재미가 없었다. 잠깐이지만 나름 무언가를 배우며 웃을 수 있었던 시간은 고3 시절 카세트테이프로 들었던 오성식의 굿모닝팝스였다. 몇 달간 독서실을 다닐 때 친구에게 빌린 자전거를 타고 집을 오갔는데, 그 사이에 듣기에 딱 좋았다. 내용을 기억하는 건 아니지만.
누군가는 공부를 왜 재미있게 해야 하느냐고 물을 수 있다. 하지만 공부를 꼭 재미없게 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물론 ‘해야 하는’ 것은 늘 노잼으로 다가오지만, 일말의가능성이라도 있다면 재밌게 하는 게 좋지 않을까. 어차피 힘든 건데 조금 덜 힘들게 하는 방법을 찾는 게 잘못된 것은 아니지 않은가.
내가 공부를 하면서(공부를 열심히 한 사람에게 사죄한다.) 가장 바랐던 건, 그 결론에 도달하는 과정이었다. 과정 또는 이유를 알게 된다면 결론에 이르는 데 혹은 답을 이해하는 데 조금은 수월하지 않을까. 워낙에 공부머리가 없어서인지 모르겠지만 결론을 보고 그것을 유추할 수 없었다. 그러니 그저 외우는 수밖에. 원소기호를 외우고 수학공식을 외웠다. (물론 조금밖에 못 외웠다.) 국민교육헌장까지. (마찬가지다.) 요상한 일이지만 아주 어린 시절에도 나는 외우는 과목을 싫어했다. 초등학생, 중학생 시절 사회처럼 그냥 외워야만 하는 과목이 다른 과목에 비해 점수도 확실히 덜 나왔다. 이해하지 못하는 걸 받아들이지 못하는 건지, 그냥 외지 못하는 건지는 모를 일지만, 어쨌든 그랬다.
그것이 무엇이든 ‘왜 그러한지’ 알려주는 사회라면 어떨까. 그래야 이해가 더 쉽다. 그래야 더 좋은 방법을 찾을 수 있다. 그것을 모르면 그것만 고집하게 되어 있다. 나라는 사람이 이해가 느린 ‘답답한 사람’이기에 그 꿈을 꾸게 되는지도 모르겠다. 때로는 과정이 더 중요한 고지식한 사람이라서 그럴 수도 있겠고. A를 설명하기 위해 B를 얘기하며 C를 언급한 것인데 C의 논리적 결함에 꽂힌다거나 하는 경우가 많은 걸 보면 꼭 그런 문제는 아닐 수도 있겠지만.
당연히 공부도 느리다. 지금 같은 세상에 내가 바라는 방식은 빵점 짜리인지도 모른다. 결과적으로 비교적 빠르게 훑은 사람이 더 나은 끝맺음을 하는 것 같으니 말이다. 뿐만 아니라 이같이 빠른 세상에서 느리디 느린 행동은 그냥 느린 게 아니라 뒤쳐지는 효과를 낳게 되니까. 그렇다고 틀렸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사람은 제각기 가지고 있는 속도가 다르니까. 스펀지처럼 빠르게 흡수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 곱씹고 곱씹어야 그나마 몇 개 건지는 사람도 있으니까.
먹었으면 언젠가는 화장실에 가야 한다. 키보드를 두드렸으면 화면에 나타나야 한다. 하지만 배웠다고 반드시 알게 되는 건 아니다. 세상이 그런 배려를 해 주면 좋겠다. 기다려 주는 거다. 배움도 소화가 필요하지 않나. 천천히, 조금은 느긋하게 기다리는 세상이길 바란다. 물론, 평균보다 오래 걸린다고 ‘소화불량’이나 ‘변비’라는 병명을 붙이지 않는 세상은 꿈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