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
자유
구속되지 않음. 내 뜻이 아닌 방향으로 가지 않아도 되는, 다시 말해 내 뜻대로 행할 수 있는, 누구에게도 무엇에도 휘둘리지 않는 것. 그것이 내가 생각하는 자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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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벽한 자유란 없다. 너무나 자연스럽게 ‘하기 싫은’ 상황에 놓인다. 혹여 하기 싫은 그것을 행하지 않는다 해도 얽매이지 않았다고 볼 수는 없다. 하기 싫다는 마음이 들었다는 것 자체가 신경 쓰인다는 의미니까.
우리는 절대로 완벽히 자유로운 상태에 놓일 수 없다. 하지만 어느 정도의 자유는 가질 수 있다. 자유라기보다 ‘최소한의 구속’이라 하는 게 좋겠다. 시각의 차이 같다. 무엇에 초점을 맞출지는 나의 몫이다.
경제적 여유
돈이 필요하다. 세상은 말 그대로 ‘숨만 쉬어도’ 돈이 필요한 곳이니까. 경우에 따라 자유에 필요한 다른 요건들을 충족시키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이 될 수도 있다. 그 돈은, 이왕이면 많은 것이 좋겠다. 물론 적어도 되지만 자신의 기준은 넘어야 한다. 먹고 살 수 있는 만큼, 삼십 평 이상의 집과 자가용까지 유지할 수 있는 만큼, 매달 한 번씩 해외여행이 가능한 만큼. 남의 기준이 아닌 나의 기준이면 된다.
적당한 무시
자유를 외치며 자유롭지 못한 이유는 결국, 욕구를 충족시키지 못했기 때문이다. 혹은 욕구를 충족시키지 못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무언가를 원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문제라면 그 요구는 끝이 없다는 것이다. 더 비싼 것, 더 예쁜 것, 더 튼튼한 것, 더 큰 것, (때로는) 더 작은 것, (어쩌면) 남들이 더 탐낼 만한 것을 원한다. 더 편하고 싶고 더 잘나고 싶고 더 주목받고 싶어서, 때로는 남들과 같으려고 혹은 다르게 보이지 않으려고(어떤 날은 다르게 보이기 위해). 간혹 현재 나의 수준으로는 실행하기에(갖기에) 버겁기 때문에 갈구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언제라도 그것을 가질 수 있다면 갈구할까? 결정만 하면 갈 수 있고 살 수 있는데 뭐가 문젠가. 그저 적절한 때에 원하는대로 하면 될 일이다.
아무리 좋은 (사실을 직시하자면, 지금 좋아 보이는 혹은, 지금 좋다고 믿어야만 하는) 것을 갖는다 하여도 그것이 평생 나에게 만족감을 줄 수는 없다. 평생은 커녕 몇 개월 몇 주 혹은 단 며칠 만에 ‘그저 그런’ 것이 될 가능성이 크다. 내가 간절히 원해서 갔던 곳, 너무나 갖고 싶어 구입했던 물건들을 하나하나 생각해 보면 답이 나온다. 여전히 그곳에 가고 싶고 여전히 그 물건이 소중할까. 여전히 닦아 주고 안아 주는가. 지금은 그것보다 더 비싼 것, 더 예쁜 것, 더 좋다고 말하는 것, 더 부러움을 살 만한 것을 생각하고 있는 자신을 보게 된다.
세상에는 해 보지 못한, 가져 보지 못한 것들이 너무나 많아 무언가를 얻은 지금도 얼른 고개를 돌려 다른 것을 갈구할 수밖에 없다. 이 유한한 삶에서 그 모든 것을 소유한다는 것이 과연 가능하기나 할까 하는 문제는 접어 두고서라도 말이다.
그래서 적당히 무시하면서 살 필요가 있다. 모른 척이 아니다. 때가 아니라는 판단이 들면 멈출 수 있어야 한다. 기준을 세워 놓을 필요도 있다. 지금 내게 가능한 정도를 파악하고 어느 선까지 갈 것인지 정해 두는 것이다. 가능 여부를 떠나 일단 마음가짐이 중요하다.
자존감
자존감이 없다는 것은 자유의지로 살기 어렵다는 것과 같다. 내가 나를 존중하지 않으니 내 말이 들리지도 않고 또 들을 필요도 없다. 하지만 삶은 늘 선택을 요구한다. 그래서 다른 사람의 말, 시선, 행동을 끌어 쓴다. 선택에 대한 (심리적) 책임을 회피하게 되어 편안할지 모르지만, 그렇다고 확신이 있는 건 아니다. 그냥 그렇게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다. 이유가 무엇이든 외부의 것들이 내 삶을 선택하게 두었으니 늘 다른 사람들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내가 빠진 삶을 산다.
자존감을 갖게 되면 외부로부터의 자유를 찾을 수 있다. 자신의 선택에 대해 책임을 지게 되지만, 동시에 나에 대한 믿음도 가질 수 있다. 시시각각 변하는 다른 사람의 말을 선별해서 들을 수 있다. 참고할 수 있으나 휘둘리지 않는다. 내가 틀렸다 해도 상관 없다. 내가 틀릴 수도 있음을 이미 알고 있기에 그 사실을 순순히 받아들이고 다음 단계를 밟을 것이다.
나에 대한 이해
나를 안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어쩌면 다른 사람을 아는 것보다 더욱 힘든 일이다. 그래도 나 자신을 알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나를 알지 못하면, 나를 이해하지 못하면 이유도 모르고 이리저리 홀리는 자신을 보는 것에 익숙해져야 할 것이다.
제삼자의 입장에서 자신을 바라보라는 말이 있다. 다른 사람을 보듯 나를 볼 수 있어야 한다. 물론 쉽지는 않다. 매일 보는 모습, 매일 겪는 ‘나’라는 존재를 객관적인 눈을 통해 바라보는 것은 하루아침에 되는 게 아니다. 어쩌면 평생 이루지 못할 수도 있다. 하물며 다른 사람도 객관적으로 바라보지 못하는 나같은 범인에게는 더더욱 그렇다. 보통은 자신을 똑바로 바라볼 용기를 갖지 못한다. 그 자체의 중요성을 모르거나, 그 시도로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자신을 마주할 자신이 없어서다. 만약 그러고자 각오했다면 반은 이룬 것이나 다름 없다.
자신을 똑바로 바라볼 수 있다면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지 또한 알 수 있다. 그 앎은 나의 선택으로 이어지고, 곧 나를 흔드는 외부의 자극에 신경쓰지 않게 된다. 옳고 그름을 떠나 자신의 뜻하는 바가 생기기 때문이다. 마음가짐에 대한, 행동에 대한 지침이 있다. 운이 좋으면 미래를 위한 방향도 정할 수 있다. 다른 사람의 말을 참고할 수는 있지만 무비판적으로 따르지 않는다.
중심 잡힌 삶은 자신을 똑바로 바라볼 수 있어야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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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고 할 만큼 될 만큼만 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내일을 바라보며 오늘을 참고, 내일이 되면 또 그 다음날을 위해 참는다고 치자. 그렇게 참고 참다가 삶의 종착지에서나마 행복을 느낄 수 있다면 그나마 다행이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매 순간 기준이 필요하다. 그 기준은 나에게 있다.
자유는 보이는 것이 아니라 느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