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분다

다수의 선택과 상식

트망 2024. 1. 12. 11:50

[마음을 열어 주는 101가지 이야기]

오래 전 히트를 친 책이다. 3권까지 나왔던 것으로 기억한다. 세 권을 모두 사서 마음 깊이 새겨 읽었다. 이야기가 기억나는 건 아니지만, 나름 감수성이 풍부하던 시기, 심금을 울리기에 충분했다.

 

이후 비슷한 제목의 책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ㅇㅇ하는 ㅇ가지 이야기’. 하도 많이 나와서 제목들이 생각나지 않는다. 사실 그 포맷을 누가 먼저 사용했는지는 모른다. 내 눈에 가장 먼저 보인 것을 처음이라 여길 뿐. 하나 잘 되니 다들(물론 다들 그런 건 아니다) 비슷한 제목을 뽑아내는 것을 보고 어린 마음에 대단들 하다고 비꼬듯 생각했던 것 같다. 물론 지금은 조금 달리 생각하지만.

 

그런 흐름에 쉽게 동조할 수 없었던 건 성격 탓이 가장 크다. 같은 것을 하는 것에 왠지 거부감을 느끼던 때였다. 그렇다고 내가 선택할 수 있는 범위가 넓었던 것은 아니다. 그 안에서 최대한 따라하지 않으려는 마음이었을 뿐. 아주 잠깐이지만 (교과서를 제외한) 책을 가까이 하려던 때가 있었는데, 그때도 제목에 ‘누구누구가 꼭 읽어야 할’ 따위의 수식어가 붙으면 절대 읽지 않았다. ‘세상에 누구나 그래야 하는 것이 어디에 있나’ 하는 생각이었다. 물론 내 눈에 매력적인 제목도 디자인도 아니었다. 모두가 ‘예’라고 할 때 ‘아니오’ 하는 용기 따위는 아니었다. 애초에 그런 용기는 없다.

 

지금이라고 크게 다르지는 않다. 무언가를 선택하는 기준에 ‘다수의 선택’은 가능한 배제시키려는 주의다. 적어도 의식하는 상황에서는 최대한 그 방향을 유지하려 애쓴다. 물론 마케팅업에 종사하거나 그런 유사한 업무를 맡게 된다면 나 역시 그런 메시지를 내보낼지도 모르겠다. 군중심리 혹은 공포는 소비자의 지갑을 여는 데 큰 힘을 발휘하는 것으로 보이니.

 

‘기본’과 ‘상식’. 이들 단어 안에는 ‘누구나’  ‘꼭’이라는 의미가 들어 있다. 그런데 보통 우리가 말하는 상식은 ‘내 기준에서’라는 전제가 깔려 있다. 문제는 자신조차 그 전제를 파악하지 못하는 데 있다. ‘내 기준에서의 상식’을 ‘모두의 상식’으로 격상시켜 버린다. 내가 알고 있으니 누구나 당연히 알고 있어야 한다. ‘내가 모르는 그것’은 상식이 아니다.

 

누구나 알아야 한다는 말은 사회의 기대일 뿐이다. 모두에게 알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는 것도 아니고, 기회가 주어진다 해도 그것을 받아들이는 능력과 의지는 또 다른 문제니까.

 

대학생 시절 나보다 조금 어린 A와 몇 번 밥을 먹은 적이 있다. 식당 자리에 앉으면 내가 물을 떠 오고 숟가락을 놓는다. 가만히 앉아 있는 A에게 나는 늘 한마디 했다. “니가 먼저 움직여야지.” “이걸 먼저 해야지.” 반드시 그래야 하는 게 아닌데 반드시 그래야 하는 것처럼 말했다. 미안하다. 조금 더 설명이 필요했다.

 

무언가를 안다면 함께 살아가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고 해서 옳지 않거나 바르지 않다고 보는 건 섣부른 판단이다. 그 무지가 남에게 피해를 주는 게 확실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누군가가, 능력이 충분함에도 불구하고 받아들이지 않을 때 정도를 제외한다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