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적은 없다
간이나 쓸개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면 친구의 일은 무조건 도와야 하는 것이었다. 원체 관심도 많았고 또 좋기도 했으니. 같이 기뻐해 주고 같이 슬퍼해 주는 일이 일상이었다. 그래서 친구들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모두에게 알리는 역할을 마다하지 않았다. 그냥 그러고 싶었다.
사람이 좋았다. 특별히 경계심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낯선 사람을 대할 때 눈을 잘 마주치거나 먼저 말을 걸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새로운 사람 앞에서는 늘 온 몸이 경직될 정도로 긴장했다. 그러면서도 늘 기대감을 가지고 있었던 듯싶다. 두려움 속에서도 애써 피하지 않은 걸 보면.
이십대를 보내면서, 아마도 이러저러한 경험을 겪고서, 사람에 대한 믿음이 조금씩 사라지게 된다. 사람을 믿으면 실망할 일이 생긴다는 것, 그 누구도 내 마음과 같지 않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에 대한 나의 믿음 100이 거의 소진될 즈음, 그 사람은 어느새 ‘무엇이라도 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믿음이 사라지면 그렇게 된다.
그래서 사람을 믿지 않게 되었다. 아니, 믿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상처를 받지 않으려는 견고한 마음일 뿐이었다. 그래서 한동안 마음고생을 했다. 사람을 믿지 않는다는 건 결국 나를 보여주지 않는다는 말이고, 사람과 사람 사이에 나를 보여주지 않는다는 것은 결국 관계하지 않겠다는 말과 같다. 그래서 외로워졌다.
마음이 정리된 후, 이제는 방향을 조금 틀기 시작한다. 전에는 믿음이 100에서 시작했다면 이제는 0에서 시작한다. 상대에 대한 믿음을 점차 쌓아간다. 상대는 모르지만 내 마음속에는 차곡차곡, 마치 마일리지처럼 쌓여 간다.
마음은 참 어렵다. 기대하기 시작하면 그 기대는 순식간에 눈덩이처럼 커진다. 무언가에 혹은 누군가에 열광하는 것이 그런 것 같다. 나름의 논리로 차곡차곡 그 마음을 키워가는 사람이 있겠지만, 사실 많은 사람은 이미 들어선 그 노선을 공고히 하기 위해 더욱 열광하게 된다. 물론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그것은 대부분 더욱 빠르게 단단해진다. 하나가 싫으면 모든 게 싫고, 첫 이미지가 안 좋으면 그 사람은 언제고 그런 사람으로 기억된다. 관련한 기억이 추가되지 않아도 그 사람은 점점 나쁜 사람, 혹은 별로인 사람이 된다. 떠올릴 때마다 그 마음이 강화되기 때문이다.
나 역시 그런 평범한 사람 중 하나임을 부인할 수 없다. 사실 좀 심한 편이다. 아닌 사람은 단칼에 잘라버리니까. 어떤 이유에서건 아니라는 판단이 들었을 때의 조치다. 누군가는 나에게 너무 그렇게 단호하게 할 필요는 없다고 하지만, 나 또한 그렇게 하지는 않기를 스스로에게 바라지만, 어디 그게 맘처럼 되어야 말이지. 다행인 건, 전과는 다르게 이제는 ‘많은’ 것에 대해 미련이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시간은 참으로 모든 것을 우습게 만들어 버린다. 세상 그만큼 중요한 것이 없던 것처럼 대했던 것에도, 절대 두 번 다시 볼 생각이 없을 정도로 화가 난 상대조차 아무런 거친 감정 없이 떠오르게 만들기도 한다. 지나고 보니 별일 아니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그때는 미처 둘러보지 못했던 당시 상황을 객관적으로 보게 되기도 한다. 그때의 상대방 마음을 헤아려 보기도 하고. 그 모든 것과는 별개로 ‘이제 와서 화를 내어 무엇 하나’ 하며 ‘다 지나간 일’이라고 인자한 표정을 짓게도 만든다. 용서나 이해, 망각과는 다르지만 무언가 벗어난 것만은 확실하다.
그래서인지 헤어지고 만나는 것은 내게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 되었다. 뭐든 ‘그럴 수 있다’는 생각. 불만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뭐든 일어날 수 있다고 여긴다. 적이 아군이 되기도 하고 아군이 적이 되기도 한다. 사람이 들고 남에 초연해진다. 또한 그로 인해 내 앞의 누군가를 소홀히 대할 수 없게 된다. 오늘 적이라면 철저히 이겨주는 것이 나의 사명이요 상대방에 대한 (어쩌면) 예우이기도 하지만, 그것도 ‘싸울 때’ 뿐이다. 그 적이 내 사람이 되기도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언젠가 나의 필요가 될 수도 있다. 언젠가는 그가 나에 대한 거친 감정을 시간이라는 핑계로 혹은 세월 덕으로 웃으며 지나칠 수 있기를 바라야 한다. 더욱 적극적으로 하겠다면, 오늘도 그를 존중해야 한다. 싸움은 싸움이고 존중은 존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