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분다

무언의 계약

트망 2024. 1. 19. 12:54
대표는 직원들을 끔찍이 아꼈다. 그들의 고충을 듣고 해결하기 위해 노력했다. 사기를 북돋우기 위해 회사의 미래를 함께 이야기했다. 부드러운 분위기를 연출하기 위해 되도 않는 농담을 자주 던졌다. 가능한 제대로 된 식사를 제공하려 노력했고 정시퇴근을 지향했다.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으니까. 주말을 앞둔 어느 날 오랜 거래처로부터 중요하고 급한 일을 받게 되었다. 주말 내에 하지 않으면 안 되는. 대표가 직원들에게 이야기한다. 하지만 그 누구도 선뜻 나서지 않는다. 잠시 동안의 침묵 끝에 한두 사람이 나선다. 그에 따라 또 슬그머니 따라오는 몇 사람. 어찌어찌 일은 처리했지만 대표는 착잡하다. 늘 우리의 비전에 대해 이야기해 주고, 급여며 복지며 나름 챙겨주려 애쓰고 있는데…. 일부러 잡은 일도 아닌데 흔쾌히 나서는 사람이 한 명도 없다니…. 내가 잘못한 걸까 직원들이 잘못된 걸까. 지금까지와는 다른 방법으로 회사를 운영해 나가야 하는 걸까.

 

오랜 친구들과 여행을 떠났다. 몇십 년이 넘는 지금까지 별 탈 없이 지낸 친구들이었기에 매우 기대된다. 얼마나 맘 편히 또 신나게 시간을 보낼 수 있을까. 하지만 설렘은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나는 여기저기 둘러보기를 원했고 한 친구는 유적지만 돌기를 바랐다. 또 다른 친구 하나는 그냥 숙소에만 있는 것도 좋다며 나갈 생각을 않는다. 한바탕 싸웠다. 지금은 다른 친구들을 통해 간간이 소식을 접하는 정도의 사이가 되었다.

 

대표가 생각하는 회사와 직원이 생각하는 회사가 다르다. 내가 생각하는 여행과 친구들이 생각하는 여행이 또한 다르다. 어떤 사물이나 행위에 대한 정의 혹은 기대감은 각자 조금씩이라도 다르기 마련이다. 우리는 하나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이 무의식적으로 그들이 나와 같기를 바란다. 하지만 우리는 절대 같아질 수 없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계약이다. 이곳 혹은 이것을 어떻게 대할 것인지 정의할 필요가 있다. 그를 위해 어느 정도까지 움직일 수 있는지 정해 놓으면 좋다. 해야 하는 것과 함께 해서는 안 되는 것도 정한다. 조건부로 가능한 일들도 정해 놓을 수 있다. 나의 그것과 상대의 그것을 조합하고 서로의 동의 하에 확정하면 된다. 그러면 할까 말까 걱정할 필요가 없다. 상대에게 그 이상을 바랄 필요도 없다. 그 이상을 해내지 못해 상대에게 미안한 마음을 가질 일도 없다. 물론 계약이라는 것이 껄끄러울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만큼 확실하게 약속할 수 있는 방법은 그다지 많지 않다.

 

계약서를 쓰지 않아서 생기는 오해가 얼마나 많은가. 이만큼은 해 줄 것이라 생각했는데 그렇게 하지 않아서 실망한다. 나는 조금 더 잘해 보겠다고 했는데 상대방은 그걸 바란 게 아니어서 싸운다. 상대가 생각한 ‘잘한다’의 의미가 나의 그것과 달라 서로 오해를 한다. 반복하건대 계약서가 있으면 그럴 일은 현저히 줄어들 것이 확실하다. 실망 혹은 다툼이란 일방적으로 가지고 있던 어떤 ‘기대’에서 발생하는 경우가 많다.

 

사람을 알아가는 것은 계약서의 항목을 써 내려가는 과정과 비슷하다. 서로를 알아가는 동안에 적고 고치는 과정을 반복한다. 문제라면 그 계약서를 각자가 상대를 ‘가늠해서’ 작성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본인만 볼 수 있다. 상대도 마찬가지다. 나의 의견, 성향, 정의 등을 가늠해서 적는다. 때문에 그에 대한 파악이 매우 중요하다. 상대가 정리해 둔 각자의 의무와 권리를 알아야 한다. 조율이 필요하다. 이왕이면 대화가 좋겠지만 필요하다면 싸움이라도 해야 한다. 그래야 관계가 건강하게 또 오래 지속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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