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분다

작은 사람

트망 2024. 1. 21. 09:29

순종적인 아이. 집을 잘 보라(대충 집을 잘 지키라는 얘기다. 예나 지금이나 꼬맹이가 수행할 수 있는 일은 아니지만.) 하니 유치원도 가지 않고 집을 지킨다. 강은 위험하니 가지 말라고 하여 저학년일 때는 어른 없이 강에 간 적이 없다. 인사를 잘 하는 건 기본이요 말대꾸 같은 것은 생각도 못했다. 권위적인 집안이어서가 아니다. 어른들의 작은 행동 하나에도 기민하게 반응하는 게 아이였다. 심지어 눈에 보이지 않는 것에서조차. 그 시절 말 잘 듣는 아이들이 꽤나 많았던 것 같다.

 

눈과 발이 닿는 곳까지가 아이의 세상이었다. 하지만 그다지 답답하지 않았다. 자식으로서 부모를 따르고 어린아이로서 어른들의 말에 토달지 않고 받아들이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옳지 않다’거나 ‘늘 옳은 건 아니다’라고 말하는 사람은 없었다. 정말 그러한가 고민하는 사람도 없었다. 의심의 여지가 없는, 너무나 익숙한 것이었다. 태어나면서부터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된 그것에서 어떤 틈을 발견하는 것이 되려 부자연스러운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이는 변했다. 사춘기 소년이 되고는 슬슬 반항이라는 것을 하기 시작한다. 여전히 말 잘 듣는 학생이기는 하지만 소심하게나마 자기의 것을 갖는다. 어른이 되어 가는 중이다. 어른을 좋아하지는 않지만 나를 아이로 보는 건 싫다. 전보다 적극적으로 생각한다. 가만 보니 어른들은 나를 설득하는 게 아니라 그저 지시하는 것만 같다. 모든 게 의심스럽다. 나름의 프로세스를 거쳐 보니 어른들이 틀렸다는 판단이 든다. 어른들은 참 시시하다. 그런 어른이 되지 않겠노라 다짐한다.

 

청소년기의 반항은 과연 자연스러운 것일까. 물론 경험이 쌓이고 생각이 많아지면서 보다 확고한 자신을 만들어 가는 때인지라 필요한 일이기는 하다. 하지만 그것을 더욱 부추기는 건 자의든 타의든 어린 시절의 침묵이 아니었을까. 선택은커녕 나의 감정조차 속일 수밖에 없었던 경험들이 그것을 증폭시키는 것은 아닐까.

 

많은 어른들이 아이를 한 사람의 인격체로 대하지 않은 것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아이는 어른들이 이끄는대로 행동해야 했다. “다 너를 위한 일”이라고만 할 뿐 그래서 그것을 통해 얻으려고 하는 것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말해 주는 일은 드물다. 의견을 묻는 건 두말할 것도 없고. 아이들은 호불호도 판단력도 없는 것처럼 대한다. 어른들이 시키는대로만 하면 되는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아주 어리숙한 존재였다. 그 어리숙함의 일정 부분은 할 말도, 하고 싶은 말도 못하게 한 어른들 때문이라는 것을 어른들은 정말 몰랐을까.

 

‘미운 네 살’이 등장한 지도 꽤나 오래됐다. 네 살이 왜 미웠을까. 아이가 자신의 의견을 말하기 때문이 아닐까. 확실하게 의사를 전달하니 그에 맞춰 주어야겠는데 그러려니 매우 피곤하다. 이전에는 아이에 대한 모든 걸 내 판단 하에 실행했지만 이제는 아이에게 물어봐야 한다. 설득해야 한다. 힘도 들고 시간도 없고 아무튼 어렵다. 역시 애들은 말하기 전이 가장 예쁜 것 같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든다. 그럼 말로 표현하지 못했던 더 어릴 때에는 의견이라는 게 없었을까.

 

관심 가질 수 있는 범위는 사람마다 다르다. 그리고 그것은 보통 ‘나’로부터 시작한다. 매슬로우의 욕구 단계처럼 방향이 있는 것 같다. 가장 중요한 건 나 자신이다. 처음에는 나 외의 존재라는 개념조차 없어 보인다. 시간이 지나 혹은 경험을 축적하며 타인의 존재를 알게 된다. 나와 같은 인간이 있다. 내가 아픈 것처럼 상대방도 아플 수 있음을 짐작하게 된다. 나처럼 상대방도 무언가 원하는 것이 있을 거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더불어 살기 위해서는 그러한 의지와 능력이 필요하다. 그것이 가능해져서 더불어 살든 더불어 살기 위해서 그 능력을 키우든.

 

하지만 아이들을 대할 때는 조금 후퇴하는 기분이다. 사람이지만 그렇다고 나와 같다고 여기지는 않는다. 나보다 어린, 미숙한, 덜 자란 사람이다. 관계에 있어서만큼은 배울 만큼 배운 것 같은데 이 관계는 다른 문제로 인식한다. 아이들을 인식하고 인정하고 배려할 수 있으려면 다시 한번 같은 단계를 거쳐야 할지도 모른다. 어렵다. 그나마 ‘어렵다’고 생각은 하니 다행이려나.

 

아이들도 생각이 있다. 자신만의 의견이 있다. 하기 싫을 수 있고 먹기 싫을 수 있다. 관심이 없을 수도, 반대로 차고 넘칠 수도 있다. 물론 누구나 알고 있다. 말 못하는 아기도 싫은 대상 앞에서는 고개를 돌려 버린다. 아이들의 그것은 이제 막 생긴 게 아닐지도 모른다. 알아듣지 못했을 뿐이다. 보지 않았을 뿐이다. 봤지만 모른 척했을 뿐이다. 그럴 리 없다고 스스로를 설득했을지도 모른다. 변한 건, 변해야 하는 건 나의 인식이다. 그러고 보면 아이들의 인내심은 정말 대단한 것 같다. 그 모든 걸 견디며 자라고 있으니.

 

비교적 작고 여리다. 보통은 어른들에 비해 경험이 적다. 그것이 전부다. 당신과 내가, 나와 그가 그러한 것처럼 ‘차이’가 있을 뿐이다. 아이들도 기쁘고 슬프고 즐겁고 아프다. 어쩌면 우리 늘 배운 그대로만 해도 중간은 갈 것 같다. 상대방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말해 주고 그 상황과 마음에 공감해 주는 것이다. 단, 조금은 더 섬세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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