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무살 가을, 알바를 가던 길이었다. 한 아주머니가 강아지를 안고 마주온다. 때마침 나와 같은 방향으로 걷던 아저씨가 그 옆을 지나치며 한소리 한다.
“지 자식이나 잘 돌볼 것이지.”
싸움이 일어났다. 나였어도 발끈했을 것이다. 무엇에 관하여든, 아무리 개인적인 의견이 있다 해도, 그런 방식으로 들어오는 건 언제나 불쾌한 일이니까.
막무가내로 우기는 스타일은 아니었지만(내 생각이다), 나 역시 집 안에서 동물을 키우는 것에 대해 상당히 부정적이었다. 집 안에 날릴 수많은 털, 멍멍 야옹 짹짹거리는 소리, 온갖 냄새, 뒤치닥거리까지. 동물을 집에 들이는 것도, 그 동물을 애지중지 키우는 것도 영 께름칙했다. 가족들에게도 저 만큼의 정성을 쏟을까 의구심을 갖기 일쑤였다. 싸우기 위해서는 아니었지만 나름 강경했다. 그때는 내 생각이 다 맞다고 여기는, 지금보다도 훨씬 생각이 짧았던 때였다. 상대방의 편견은 잘 짚었지만 나의 색안경은 깨닫지 못했던 때.
인간은 외롭다. 집을 나서면 그곳이 어디든 사람들로 북적이지만, 외로움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저들 중 누군가는 나와 매일같이 마주하는 사람이지만, 그에게 친근감을 갖는 건 완전히 다른 문제다. 친구라고 만나서 이런저런 수다를 떨지만 왠지 모를 소외감을 느낄 때도 많다. 누군가는 그 조차도 없을지 모른다. 텅 빈 집의 문을 여는 것이 싫어서, 그 집에 혼자 있는 것이 싫어서 최대한 늦게 집에 들어가는 사람이 있을런지도. 짧은 기간의 자취생활이었지만 두 번째 해부터는 가능한 밖에서 저녁을 해결하고 들어가려던 나처럼.
나를 따르는 동물이 있다면 마음의 위안이 되겠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쓸쓸한 마음을 채워 줄 수 있다면 그것이 무엇이든 좋지 않을까 마음이 바뀌기 시작했다. 누군가에게는 그것이 동물이겠구나 싶었다.
출근하면 가지 말라고 낑낑대고 퇴근하면 벌써 문 앞에서 꼬리를 흔들며 기다리고 있는 강아지를 보고 웃음 짓지 않는 사람이 많지는 않을 것이다. 함께 산책을 나갈라치면 또 얼마나 좋아하는지. 절대 나를 배신하지 않는 누군가가 있다는 건 축복일 수 있다. 유튜브에 동물 컨텐츠가 차고 넘치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
언젠가부터 집에서 기르는 동물을 반려동물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그만큼 생명에 대한 인식이 높아진 것으로 보인다.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거의 사용하지 않는 단어 ‘반려’에 개인적으로 약간의 의아함이 생겼던 건 사실이지만, 그 마음이야 당사자가 알겠지 싶어 소심한 반발도 저 멀리 던져 버렸다. 아무튼 나도 조금씩은 성장하던 터라 사람들의 마음을 더 헤아려 보려 노력했다. 사람에게는 관심과 사랑의 주고받음이 필요하고 그 대상은 각자 다를 수 있다. 그리고 반려동물은 어떤 면에서는 가장 확실한 대상이었다.
사람의 말을 찰떡 같이 알아듣고 어린 아이를 지키듯 조심스럽게 주위를 서성이는 반려견을 보면 절로 미소가 나온다. 길을 걷다 보면 산책을 나온 반려견도 자주 만난다. 사람을 만나면 세상 그보다 좋은 일이 없다는 듯이 꼬리를 흔들며 반기고, 잘못한 것에 대해 꾸중하면 마치 사람처럼 뾰루퉁해 있거나 눈 마주치기를 꺼려 한다. 사람이 탈을 쓴 것이 확실하다고 댓글이 달린다. 여전히 그들의 마음을 모두 공감하지는 못하는 나지만, 어쩔 수 없이라도 그런 생명체와 함께 해야 한다면 푹 빠지는 데 단 하루면 족할 것 같다.
물론 고민이 생길 것이다. 병원에 가야 할 때나 배를 채워야 할 때 우선순위는 누가 될 것인가. 돈이든 시간이든 마음의 여유든 자원이 한정되어 있는 우리에게 언제고 닥칠지 모르는 그 문제는 어떻게 풀어나가야 할 것인가.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처럼 사람과 반려동물 사이에서도 피할 수 없는 일이다. 반려동물도 가족이라고 하는데 그렇다면 반려동물을 포함한 가족 모두의 욕구에 대해 우선순위를 정할 때에도 정말 가족처럼 대할 수 있을까. 어떤 결정을 앞에 두고는 사람보다 덜 무거운 마음을 갖게 되지 않을까. 집에 불이 나고 그 안에 반려견 혼자만 있음을 알고 있을 때 소방관을 향해 ‘우리 강아지가 있으니 꺼내 달라’고 당당히 말할 수 있을까.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많은 사람들이 일명 ‘반려’견을 당당히 ‘구매’했다. 여전히 하나의 상품이었다. 따지고 보면 너무나 당연했다. 많은 사람들이 ‘작고’ ‘귀엽고’ ‘건강한’ 동물을 찾았다. 품종을 따졌다. 그걸 알고 문을 연 매장에는 늘 그 마음을 만족시키는 동물들이 있었다. 변해 가는 동물에 대한 인식 속에서도 누군가는 쉬쉬하고 있었겠지만, 사실 많은 동물들은 ‘생산’되고 있었다. 개의 많은 품종을 사람이 인위적으로 만들었다는 사실에 경악했던 날이 떠오른다.
지금의 나는 반려동물을 키우는 데 반대하지 않는다. 그 과정이 납득할 만하다면 동물을 파는 행위를 적극적으로 말릴 것도 아니다. 다만, 조금은 더 객관적으로 바라볼 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저 먹고사는 일만으로도 바빴던 과거를 벗어나고 있기에 반려동물에 대한 관심이 이렇게 커질 수 있었다. 그렇다면 이제는 ‘반려동물’과 관련된 전반적인 것들에도 눈을 돌릴 때가 되지 않았을까. 누군가는 여전히 최선을 다해 감추려 하지만, 약간의 의지만 가지면 알 수 있는 것들이 많다.
그나마 개는 비교적 인간과 친근하니까 변화가 보인다. 하지만 여전히 멀리 떨어져 있는 나로서는 고양이, 새, 파충류 등도 달라 보이지 않는다. 누군가는 열심히 상품화를 하고 누군가는 쇼핑을 하고 있다. 그 자체를 탓하지는 않는다. 어떤 면에서는 필요할지도 모르고. 하지만 사랑과 관심을 말하려면, 적어도 ‘애완동물’이 아닌 ‘반려동물’을 키우려면, 한꺼풀 정도는 들춰봐야 되지 않을까? 딱 떨어지는 정답을 찾을 수는 없을지라도 말이다. 생명을 가족으로 받아들일 땐 그만큼의 책임이 뒤따른다.
언젠가, 어떤 이유에서든, 반려동물을 키우게 될까 봐 걱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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