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분다

잊기를 잘했다

트망 2024. 2. 21. 07: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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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음식점은 2년 전 네 생일이던 xx월 xx일 오전에 배가 살살 아파왔음에도 너의 초롱초롱한 눈망울에 못이겨 30분을 줄을 서서 기다린 후에야 들어갔는데 주문을 받으러 온 직원에게 물컵에 고추가루가 묻어 있어 바꾸어 달라 했더니 투덜대며 응대하던 그 모습에도 인터넷 맛집 평가의 추천 수가 증명해 줄 것이라며 울그락불그락한 얼굴로 두 주먹을 움켜쥔 나를 달래던 네가 추천요리를 시켰고 무사히 음식을 받게 됐지만 한두 젓가락 맛을 본 서로의 눈을 보며 말없이 이건 절대 아니라는 의견일치를 보았기에 반 이상 남은 음식을 두고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섰고 그럼에도 음식이 어떠셨냐는 사장의 가식처럼 느껴지는 웃음 앞에 역시 같은 류의 미소를 지으며 맛있는데 배가 너무 불러서 남겼다는 누구도 믿지 않을 발연기를 펼쳐 보이며 문을 나서자마자 다시는 오지 말자고 손가락 꼭꼭 걸고 다짐했던 그곳이잖아.

그런데 여기를 또 들어가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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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이거 네가 여섯살 때 너무나 가지고 싶다고 해서 평소에 무언가를 잘 사지 않는 나였음에도 그 간절함이 너무나 진심으로 느껴져서 그때의 나로서는 부담이 되지 않을 수 없는 가격이었음에도 그래 이번에는 반드시 사 주어야지 하는 마음으로 인터넷을 검색하였으나 며칠을 뒤져도 같은 상품은 나오지 않았기에 다른 나라에서 파는 물건까지 뒤지고 뒤져서 어렵게 하나를 찾아 쇼핑몰에 가입하고 또 이런저런 평생 처음 해 보는 단계들을 하나 하나 공부해 가며 노력한 결과 드디어 결제를 하고 그거 언제 오냐는 너의 집요한 물음을 보름 간 전해들으면서도 보챈다는 생각은커녕 그 기뻐할 모습만 눈에 그리며 무사히 도착하기만을 기다렸다가 드디어 물건을 받고 네가 좋아하는 그 캐릭터 포장지로 다시 한번 포장을 하고는 룰루랄라 너에게로 가서 짜잔~ 내밀었더니 선물에 눈을 고정시킨 채로 엄마가 시킨 배꼽인사와 포옹을 잽싸게 한 후에 곧 포장을 북북 찢어 버리고 내용물을 보고는 어떤 것을 받을지 알고 있던 것 치고는 너무나 방방 뛰며 좋아했기에 그동안 하얗게 불태웠지만 그래도 그 인고의 시간이 헛되지 않았구나 하였는데 이틀 후 다시 만났을 때 다른 장난감을 가지고 노는 너에게 물으니 새 장난감을 받아서 그건 헌 것이 되었으니 재미 없다 말하고 휑 하고 가 버리며 내 세상에 다시 없을 허무함과 분노를 주었던 그 사건의 중심에 있는 물건이잖아.

그걸 다시 사달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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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모는 타고난 거라고, 눈의 모양, 코의 높이, 키, 체형 등은 때론 어쩔 수 없는 거라는 걸 너는 분명 동의했으며 설사 그것들에 변화를 주는 것이 가능하다 하여도 길고 짧음, 무겁고 가벼움, 크고 작음, 매끄럽고 거침 사이에 옳고 그름은 없다는 사실 또한 알고 있고 누군가 너에게 키가 작다 못생겼다 말하면 그런 주관적인 것으로 사람을 판단하지 말라고 성을 내며 그런 것으로 사람을 판단하는 그들의 인성과 수준이 참 별로라고 말하면서 개인마다 호불호가 있는 것은 이해할 수 있지만 적어도 그것을 그런 방식으로 내뱉는 건 절대 해서는 안 되는 행위라며 성토하던 너였잖아.

그런데 쟤는 인상이 별로여서 싫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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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은 무언가를 계속 이어나갈 수 있게 만든다. 오늘이 어제의 내일임을 알 수 있다. 저 사람이 나의 지인임을 알 수 있다. 내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도 안다. 하지만 기억에는 한계가 있다. 입력되지 않은 것인지 혹은 그저 출력되지 않을 뿐인지 알 수는 없다. 확실한 건 그것을 정확히 인지하기는 어렵다는 사실. 그래서 기억을 도울 여러 가지 방법을 강구한다. 휴대폰을 열어 메모를 하고 사진을 찍는다. 메모지에 직접 적는다. 하지만 정작 찾아보려고 할 때 그것이 어디에 있는지를 또 잊는다. 정말 내가 기록을 했는지도 가물가물하다. 다시 다짐한다. 일정한 시간 일정한 곳에 기록해 보는 건 어떨까.

 

그렇게 해 놓은 기록에는 힘이 있다. 일단 기억에 힘을 보탠다. 기억하지 못하는 것 혹은 꺼내지 못하는 것을 보다 확실하게 해 준다. 좋은 기능이다. 하지만 더 중요한 건 기록 자체일지도 모른다. 생각이나 말과는 달리 기록은 비교적 일목요연하다. 시간이나 논리의 흐름에 따라 적는다. 뒤죽박죽이던 생각이 종이나 모니터에 자리잡으며 정리가 되기도 한다. 여기저기 펑펑 터지며 뻗어나가는 머리속의 생각처럼 떠오르는대로 기록하는 것은 어떤 의도가 있을 때뿐이다.

 

하지만 세상에는 기억하지 말아야 할 것들이 있다. 기억하지 않을 수 없더라도 살다 보면 그래야 할 때가 생긴다. 이유는 간단하다. 원만한 관계를 위해 그리고 나의 건강 혹은 생존을 위해. 게다가 돌진하는 나의 몸과 입을 붙들어매지 못할 상황을 만든 상대라 해도 그 속까지 검다고 볼 수는 없으니까. 때로는 훌훌 털어 버리는 연습이 필요하다.

 

그래서 가끔은 잊기를 잘했다는 생각을 한다. 대부분은 의도하지 않은 것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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