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당을 예약했지만 큰 도로로 나가기도 전에 무산되어 버렸다. 아마도 광주 즈음부터 내리기 시작한 눈이 쌓이고 쌓여 길을 가로막았기 때문이다. 제동이 되지 않아 앞의 턱에 쿵 받은 후 차가 멈춘다. 워낙에 속도가 느렸던지라 다행히 사람에게 가해진 충격이 크지는 않았다. 부딪힌 부분을 살필 생각도 하지 않고 차를 돌려 슬금슬금 부모님댁으로 돌아갔다.
아내가 어머니 밥 차리지 마시라고 나가자고 한 건데, 결국 어머니의 밥을 먹었다. 불어난 배를 두드리며 TV를 보는데 아버지가 한참 동안 보이지 않는다. 눈을 치우러 나가신 건 알았지만 꽤 오래 걸리신다는 생각이 들어 집앞으로 나가 본다. 넉가래 두 개를 붙여 눈을 밀고 계셨다. 집앞의 눈은 이미 거의 다 치워져 있었고.
아내와 어머니가 나오셨다. 애들이 오면 참 좋아하겠다, 같이 있었으면 재밌게 놀 텐데 하다가, 눈사람을 만들자는 얘기가 나왔다. 그렇게 우리는, 어머니, 아버지, 아내, 나 네 사람은 눈사람을 만들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눈을 굴려 큰 덩어리를 만들어 며느리에게 주셨고, 이내 나도 큰 덩어리를 만들기 시작한다. 얼굴은 무엇으로 할까 팔은 또 어떤 것으로 하지 고민하던 차에 집으로 들어간 어머니가 숯덩이 몇 개와 당근을 가져오셨다. 어느샌가 아내는 나무젓가락을 챙겨 나온다. 숱으로 눈을 만들고 당근을 코와 입 위치에 꽂아 넣는다. 가느다란 나무젓가락 팔이 아쉬웠는지 어머니는 다시 고무장갑을 가지고 등장하셨다. 짧은 팔을 배려하여 고무장갑을 접고 접어 양쪽 나무젓가락에 걸친다. 그렇게 눈사람 둘이 완성됐다. 제작자 평균 나이 약 55세였다.
가끔 어린아이 때와 같이 천진난만하게 행동할 때, 동심에 빠졌다고 말한다. 동심. 어린아이의 마음이다. 나이를 먹고 먹어도 고등학교 동창을 만나면 고등학생이 되고 초등학교 동창을 만나면 초등학생이 된다. 기억이 허락하여 유치원을 같이 다닌 친구를 만날 땐 유치원생이 될지도 모른다. 마치 그때처럼, 마치 그때의 마음처럼 이리저리 누비는 것이다.
어쩌면 그것은, 동심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사라진 마음이 아니라 늘 가지고 있는 마음인 것이다. 누구나 놀고 싶다. 세상이 또 나의 마음이 허락하는 한 나를 붙드는 모든 걱정을 저 멀리 던진 채로 이리저리 누비고 싶은 마음. 흉내내는 것이 아니다. 우리 모두는 그것을 가지고 있다. 차마 내놓지 못하는 것일 뿐.
본심이라고 생각했다. 주변의 모두가 ‘그래도 괜챃다’는 기운을 내뿜을 때만 호시탐탐 노리는, 당신과 나의 진심. 나쁘거나 부끄러운 게 아니지만 차마 드러낼 수 없었던 너와 나의 또다른 모습. 어쩌면 실제 모습.
지금보다 조금 더 본심으로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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