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것 아닌 것을 별것으로 만드는 아주 쉬운 방법이 있다. 바로 ‘퉁명스럽게 말하기’다. 관심 없는 듯 혹은 약간은 비아냥거리는 듯 툭 던지는 거다. 그걸로 족하다. 듣는 사람이 바라는 것이 무엇이든, 때론 바라는 것이 전혀 없었더라도 그 시간은 매우 특별해진다. 아주 효과적인 방법이다. 큰 힘 쓰지 않고 상대방의 마음을 상하게 할 요량이었다면. 그럴 마음이 없었다면, 큰일이다. 시작의 쉽고 가벼움과는 다르게 수습은 언제나 그렇듯 적극성과 큰 에너지가 필요한 법이니까. 알고 있다. 아니, 늘 생각하고 다니는 건 아니지만 만약 생각을 했더라면 그것이 결코 좋은 것이 아님을 나는 알고 있다. 어떤 것은 아주 작아 보여도 되돌릴 수 없는 결과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도 충분히 가능하다는 것 또한. 그러나 알고 있는 나와 행동하는 나는 그다지 사이가 좋지 않은 모양이다. 협응력이 필요하다.
가족과 대화를 할 때면 그 모습 참 가관이다. 보통은 대화가 아니다.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린다는 표현에 정확히 들어맞는다. 반면 이런 경우도 있다. 모든 말을 분석한다. 하나라도 잘못된 것이 있다면 지적하기 바쁘다. 틀린 어휘를 사용했다면 말을 끊으면서까지 정정한다. 이야기의 목적과 의미는 내 귀에 닿지 않는다. 빨간펜을 들어 밑줄을 긋고 수정할 뿐이다. 말하는 사람이 말을 이어갈 수가 없다. 대화는, 처음부터 대화일 것도 없었던 그것은 길을 잃고 헤매다가 이내 끝나 버린다. 그러면 나는 말한다. 도대체 왜 말을 하다가 마느냐고. 나는 그 이유를 알아들을 ‘자세’를 갖추지 못했음이 자명함에도 말이다.
가족을 생각할 때면 늘 후회가 앞선다. 왜 닥달만 했을까, 왜 더 들어주지 못했을까, 왜 그 의미를 들여다볼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그래도 된다고 여기는 것은 아니었다. 돌아서면 늘 마음 한켠에 무언가 한줌씩 남아 있는 것만 봐도 그렇다. 그럼에도 다음에 잘할 수 있다는 보장을 못한다. 멀어지면 기억이 돌아왔다가 만나면 다시 기억을 잃고 그저 냉정해진다. 감정을 배제한 그것이 ‘객관적 시각’인 것처럼 군다. 오늘도 누구 하나 즐겁지 않는 대화다. 아니 그저 말의 주고받음이다.
하지만 또 다른 나는, 분명 어딘가에서 누군가의 말을 듣고 의미와 감정을 파악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숨은 뜻을 찾고자 했고 그 감정에 공감하고자 했다. 그렇다. 적어도 나는 그러한 시도를 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렇다면 왜 상황에 따라 혹은 사람에 따라 태도가 바뀌는 것일까.
해야 하는, 할 수 있는 그것을 하지 않는 걸 익숙함이나 편안함으로 덮어 버리는 건 너무나 무책임한 태도다. 그래야 한다는 걸, 사실 나는 이미 알고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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