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분다

어쩔 수 없는 일

트망 2024. 3. 19. 17:11

약속장소에 거의 다 왔는데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1km도 안 되는 직선거리를 가는데 30분이 넘게 걸렸다. 물론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집에 가는 길. 서울 한복판에서 그런 광경을 볼 줄은 상상도 못했다. 차들이 기어가고 있었다. 브레이크를 밟으면 자동차가 미끄러졌다. 조금이라도 경사가 있는 곳엔 바퀴가 헛돌아 제자리에서 오도가도 못하는 차들이 보인다. 바짝 긴장한다.

 

가까스로 내가 갈 방향의 주 도로로 들어섰을 때, 나는 진짜와 마주했다. 건물 하나 없는 그곳은 사방이 하얀 세상이었다. 두껍게 쌓인 눈은 밟히고 밟혀 땡댕 얼어 있었는데 그 위에 계속해서 눈이 내리고 있었다. 차선은 없는 것과 같으니 차들의 방향이 제각각이다. 거기다 얼어붙은 바닥은 울퉁불퉁하다. 미끄럽고 울퉁불퉁한 도로라니 정말 최악이었다. 대각선으로 미끄러지고 있는 차들, 차선 상관 없이 멋대로 멈춰 있는 (아마도 버려진) 차들이 한눈에 보였다. 흡사 멸망한 세상을 묘사한 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

 

아직 운이 좋은 몇 대의 차들만 덜덜거리며 그 사이를 아슬아슬 지나가고 있었다. 나 역시 그들 중 하나였고. 등줄기에 식은땀이 흐른다. 무사히, 아무일 없이 집에만 도착해야겠다 하며 핸들을 부여잡았다.

 

-

 

컨트롤이 불가능한 상황을 만날 때가 있다. 내가 노력한다고 될 일도 아니고, 내가 건드릴 수도 없는 그런 상황들이 있다. 물론 그것이 나의 소관이 아니라는 것쯤은 알고 있다. 그래서 종종 원망을 선택한다. 우리집이 잘 살았으면, 내가 거기에 있었다면, 그런 일이 없었다면….

 

하지만 아니다. 그럴 수는 없다. 관여할 수 없는 일이다. 관여할 수 있었다 해도 이미 벌어진 혹은 지나간 일이다. 다른 경우의 수는 없다.

 

사태파악의 목적이 아니라면 굳이 바라볼 필요 없다. 그다음 내가 할 일은 그것을 이겨내거나 그것을 이용하거나 둘 중 하나다. 폭설이 내리던 날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전방을 주시하고 핸들을 바르게 잡은 채로 천천히 전진하는 것이었다. 눈이 오는 것을 원망할 것 없다. 그럴 시간도 없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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